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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정신문화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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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역사,철학 등 인문학의 본질을 연구하여 의정부시민의 인문학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성찰하여 인문 본연의 기능을 더깊게 추구하고  스스로 삶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제시하는 활동입니다


[칼럼][사회]세상을 바꾼 법 탄생 물꼬를 튼 건 평범한 시민들

김용수
2021-04-22
조회수 353

 

여자는 스물여섯 넘으면 결혼하는 게 정상’이라는 사법부의 공식(?) 선언은 대한민국 주부들을 허탈과 충격으로 몰아넣은 판결이기도 했다. 가사 노동 임금 기준을 ‘일당 4천원’으로 산정했기 때문이다. 여성단체들이 들고 일어났고 항의도 빗발쳤지만 이경숙 본인은 더 이상 소송을 끌고 갈 여력이 없었다. 그때 한 변호사가......


법에 대한 경외감이 강한 한국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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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법원 공개변론 현장(이미지 출처 : 대법원)




한국 사람에게 법이란 무엇일까. 우리들이 즐겨 구사하는 일상 언어 속의 ‘법’을 보면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을 당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렇게 외친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어?”. 무던하고 착한 사람에게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찬사가 따라붙으며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걸 알기에 자유로운 ‘무법천지’보다는 ‘법질서’에 대한 존중이 본능적으로 앞선다. 말싸움이 벌어지고 나오면 흘러나오는 말이 ‘법대로 하자’다. 이렇게 보면 한국 사람들의 법에 대한 경외감은 세계적으로 평균 이상이 아닐까 추측 되기도 한다.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말대로 대한민국은 ‘법치국가’, 즉 법이 다스리는 나라이니까 말이다. 간단한 예화 하나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37년간의 명령 ‘한국인들의 하루 활동시간은 20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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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년 만의 통행금지 해제 소식을 전하는 신문기사(이미지 출처 : 중앙일보 1982년 1월 5일)



해방 이후 1982년에 이르는 37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한국인들은 하루 24시간이 아닌 20시간을 살았다. 1945년 9월 7일 미 군정 당국이 치안유지를 이유로 서울과 인천 지역에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령을 내렸고 이것이 전쟁 이후 전국으로 확대돼 대략 12시에서 4시까지의 ‘통금’이 법으로 적용됐던 것이다. 그리고 법은 그에 따른 일상과 문화를 창조했다. 폭탄주로 대변되는 한국인들의 속전속결 술자리 문화는 통금 때문에 형성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퇴근하고 술자리에 둘러앉으면 7-8시인데 냅다 빨리들 먹고 취해야 했으니까. 통금 사이렌이 울린 뒤에는 방범대원과 경찰이 순찰을 돌다가 통금 위반자를 발견하면 불문곡직 파출소로 끌고 갔다. 그것이 법이었다. 그리고 법에 규정된 한국인의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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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서울 시내 야간 통행차량 검문 모습(이미지 출처 : 문화일보 2015년 1월 6일)



만에 하나도 그럴 일이 없긴 하겠으나 요즘 누군가 통금을 부활하겠다는 발상을 한다면 전국주점연합회와 택시노조와 대리운전기사연합과 각지의 상가 번영회의 극한투쟁에 직면해야 할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아주 옛날에는 통금이 있어서 12시 이후에 나다니면 잡혀갔다고 한다면 구한말에서 시간 여행 온 사람 보듯 쳐다보지 않을까. 이렇듯 법은 우리 사회 전반과 개인의 일상에 강력하면서도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여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하는 존재다.

여성의 간통에만 죄를 물었던 법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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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법대전(이미지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05년 4월 20일 대한제국 법률 제3호로 공포된 형법대전(刑法大全)에는 이런 규정이 있다. “유부녀가 간통한 경우 그와 및 상간자를 6개월 이상 2년 이하의 유기징역에 처한다.”(동법 제265조) 즉 간통의 책임을 유부녀’에게만 지우고 바람이 나든, 첩을 들이든 남자에게는 사법적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된 대한민국의 법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한국 정치사의 여걸 박순천(여성운동가. 정치인. 제2,3,4,5,6,7대 국회의원)은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19명 중의 여성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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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에서 발언 중인 박순천 전의원(이미지 출처 : 부산일보 데이터베이스)


그가 이끌던 대한여성회는 간통죄 쌍벌제 즉 간통남도 처벌하도록 법을 개정하자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박순천은 낙선하고 말았다. 해당 지역구의 여성 표를 잃었기 때문이다. 박순천의 지역구는 종로구였고 당시 종로에는 국내 최고의 홍등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부유한 남자들이 두 집 살림을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던 시절, 간통죄 쌍벌제가 적용되면 피해를 볼 것을 우려한 홍등가 여성들이 박순천을 보이콧해 버린 것이다. 거기에 “여자만 처벌해야 한다. 여자는 남자와 생리적으로 다르고, 심리적으로 다르며, 또한 남자의 성욕과 다르다. ”(대법관 최병주)거나 “우리 헌법 정신도 조상이 남겨준 피의 순결을 고수해 나가는 데 대해서는 조금도 위반됨이 없으리라 믿는다. 부녀층에 대해서는 좀 미안하지만 여자만 처벌하자. ”(국회의원 방만수)는 남자들까지 가세하고 보니 간통죄 쌍벌제의 길은 난항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줄기차게 간통죄 쌍벌제를 외치던 사람들의 압력으로 이 법안은 1953년 7월 국회에 상정된다. 투표 결과는 아슬아슬했다. 당시 국회의원 재적의원수 110명의 과반수에서 한 표가 많은 57표로 통과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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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의 간통죄 쌍벌제 통과를 전했던 언론기사(이미지 출처 : 경향신문 1953년 7월 5일)


우여곡절이야 어찌 되었든 새로운 법이 발동됐고 한국 사회는 그에 따라 변화해 갔다. 바로 다음 해인 1954년 어느 주부가 첩을 들인 남편을 간통죄로 고소하면서 새 역사(?)를 쓴 것이다. 기절초풍한 남편이 위자료를 줄 테니 고소를 취하하라고 하자 아내는 이렇게 대답한다. “사회 정화를 위해 고소 취하는 못하겠다. ” 이미 그녀는 법의 날개를 달고 있었다. 가부장제가 굳건하던 시절, 간통죄 쌍벌제 도입은 바닥 수준이었던 여성 인권의 최후의 보루 역할을 톡톡히 했다. 물론 시대가 바뀌고 사회적 분위기가 변화하면서 간통죄는 또 다른 의미의 억압이 됐고 2016년 마침내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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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법재판소의 간통죄 위헌 판결 뉴스 (이미지 출처 : 연합뉴스TV 2015년 2월 26일)


사법부의 공식(?) 선언 “한국의 여성 정년은 스물여섯”

1985년 4월 서울민사지법합의 15부(재판장 유태현 부장판사)는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될 판결을 내린다. 교통사고를 당한 스물세 살의 회사원 이경숙이 택시 회사를 상대로 낸 피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우리나라 여성의 평균 결혼 연령인 26세부터는 가사노동에 종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라고 판결한 것이다. “미혼여성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26세에 달하면 결혼하고 퇴직한다고 보아야 하며...... 26세부터 55세까지는 (회사 임금이 아니라) 일반도시 일용노동에 종사하는 성인 여성의 평균 임금으로 계산해서 손해배상 액수를 산출”한다는 것이었다. ‘여자는 스물여섯 넘으면 결혼하는 게 정상’이라는 사법부의 공식(?) 선언은 대한민국 주부들을 허탈과 충격으로 몰아넣은 판결이기도 했다. 가사 노동 임금 기준을 ‘일당 4천원’으로 산정했기 때문이다. 여성단체들이 들고 일어났고 항의도 빗발쳤지만 이경숙 본인은 더 이상 소송을 끌고 갈 여력이 없었다. 그때 한 변호사가 혜성과 같이 나타난다. ‘신문을 보고’ 연락을 하는 것이라 했다. “제가 변론을 해 드리겠습니다. ” 하지만 이경숙은 망설였다. 지긋지긋하게 불러대고 물어대고 따져대는 법정 투쟁을 계속할 의사도 능력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변호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제가 무료로 변론해 드릴께요. 한 번 가 보십시다 에?” 이경숙 본인도 황당했을 것이다. 대체 이 사람은 무엇이며 신문 몇 줄 보고 와서 왜 나한테 이런 식으로 들이대는 것인가? 그러나 변호사의 열정은 그 의문을 덮을 만큼 대단했다. 온갖 설득으로 원고의 마음을 돌려 놓았고 재판도 시작하기 전에 최종 변론같이 기나긴 ‘의견서’를 작성해 재판부의 기를 질리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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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영래 변호사(이미지 출처 : 네이버)


“사실 우리나라 주부들의 가사노동 대가를 금전으로 환산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러나 그 기준을 하필이면 ‘최하위 생계노동’인 도시 여성의 날품삯 4천원으로 삼은 것은 정당하게 평가하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헌법에 보장된 권리가 사법부에 의해 인정되지 않고 확인되지 않는다면 여성들이 기댈 언덕은 없는 것이지요! ”

이 변호사의 이름은 조영래. <전태일 평전>의 저자이며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 권인숙의 변호인으로서 역사에 길이 남을 활약을 펼쳤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무료 변론을 자처한 조영래 변호사와 여성 단체들의 응원 속에 이경숙은 소송을 재개했고 1986년 3월 4일 고등법원으로부터 원고 승소 판결을 받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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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숙씨의 사건승소 판결 관련 문서(이미지 출처 : 한국여성단체연합)


그 황망한 싸움을 통해 판례로 남은 ‘25세 정년’의 벽을 무너뜨린 이경숙은 더욱 단단해져 있었다. “여성 55세 정년은 인정됐지만 (법원은) 연 400%의 상여금과 계속 근무 시의 임금 인상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 여성 정년 문제는 관철됐으나 노동자로서의 피해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위해 대법원에 상고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고인 물처럼 고인 법도 썩기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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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이미지 출처 : koreanwikiproject)


대개 법은 그 시대의 한계선이다. 이 이상은 뚫고 올라갈 수 없다고, 또는 내려갈 수 없다고 그어 놓은 금이고, 넘치는 또는 모자라는 물을 일단 보관하는 둑이다. 그러나 고인 물이 썩듯 고인 법도 썩는다. 법(法)이라는 단어 자체가 물(水)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去) 규칙이 있다는 뜻을 가진 것처럼, 법은 때가 되면 물처럼 흘러야 한다. 또 흐르는 물이 새로운 물길을 내고 주변을 기름지게 하듯 법이 사회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사회가 법을 만들지만 법이 새로운 사회를 앞당기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더하여 기억할 것은 그 물꼬를 틔우는 것은 판사나 변호사,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이기도 하지만 여자는 나이 스물 다섯이 정년이라는 ‘법’에 저항하고 여성의 권리 뿐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도 되찾겠다고 나섰던 이경숙씨 같은 보통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시민이기도 하다는 사실이겠다.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기 전에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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